국립경기장의 기억 vol.10 #ThisisTOKYO

COLUMN2022.4.07

국립경기장의 기억 vol.10 #ThisisTOKYO

드디어 4월 29일(금·공휴일), 도쿄가 새 국립경기장에서 첫 J리그 경기를 치른다.

개수 이전의 국립경기장에서는 J리그 가입 첫 해부터 많은 공식 경기를 치러왔다. 기억에 남는 슈퍼 플레이도 있었고, 임팩트 있는 이벤트도 있었다. 간절히 바라던 타이틀 획득 이후, 도쿄가 모든 타이틀을 국립경기장에서 획득한 것은 도쿄와 국립경기장의 깊은 인연을 상징한다.

우리의 국립경기장.

This is TOKYO.

새로운 발걸음을 국립경기장에서 새기기 전에, 지금까지 국립경기장에 남겨온 발자취와 추억을 당시 사진과 함께 되돌아본다.

2009년 파이널. 7번과 8번의 이야기

【경기 정보】
2009 J리그 야마자키 나비스코컵 결승
FC 도쿄 2-0 가와사키 프론탈레

환희의 목소리를 모으는 가운데서 본 한스러운 눈물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것은 등번호 7과 8의 이야기의 일부이기도 했다. 아사리 사토루와 후지야마 류지. 도쿄가스 축구부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걸어왔다. 두 사람의 도쿄 마지막 해였던 2009년 야마자키 나비스코컵에서 팀은 5년 만에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그 결승전 직후였다. 국립경기장 주차장으로 향하는 아사리에게 다가가 불렀다. 처음에는 "5년 전보다 팀이 성숙해졌다고 생각한다. 경기 운영도 우승을 다투는 팀에 걸맞았다……"라며 평소처럼 이야기했다. 다만, 조금씩 감정이 북받쳤던 모양이다. 그 후에 이어지는 말은 없었고, 꾸민 미소도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그 장소에 후지 씨와 함께 서고 싶었어요"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와 그 표정을 떠올릴 때마다 지금도 가슴이 조여 온다.

죠후쿠 체제 2년 차인 이 해, 팀은 경기를 거듭할수록 성숙해졌다. 여름이 지나갈 무렵, 평소에는 신중한 토쿠나가 유헤이가 "어느 팀이 상대여도 질 것 같지 않다"고 말한 것은 놀라웠다. 그만큼, 나아가는 곳마다 적이 없는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점차 그 톱니바퀴도 어긋나기 시작했다. 놀라운 속도로 상대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던 카보레는 팀 사정으로 나비스코컵 결승 진출을 남기고 중동으로 이적했다. 거기에 득점을 양산하던 이시카와 나오히로가 부상으로 장기 이탈하는 사고도 겹쳤다. 결승전의 사전 평가는 가와사키 프론탈레 유리였으며 결코 높지 않았다.


그 가운데, 이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클럽은 창설 이래의 공로자였던 후지야마의 퇴단과 아사리의 현역 은퇴를 발표했다. 고졸 루키인 요네모토 타쿠지의 대두로 인해 아사리는 출전 기회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 영향도 있었지만, 이 결정에는 “그 나비스코 결승이 있었기에 현역 은퇴 발표도 앞당기고, 여기서부터 후지 씨와 둘이서 팀에 활력을 불어넣자고 이야기하며 해왔다”(아사리)라는 두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아사리(浅利)는 결승전 벤치 멤버에서도 제외되고 만다. 그 사실을 통보받은 경기 전날, 아사리는 팬 서비스 존을 가로질러 탈의실로 곧장 향했다. 그곳에서 아사리와 단둘이 남게 된 후지야마(藤山)는 눈앞에서 흐느끼는 동료의 유니폼을 입고 다음 날 결승에 임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결승은 전반 22분, 프로 입단 전부터 아사리의 플레이뿐만 아니라 일상의 자세까지 직접 보고 자신의 목표라고 말해온 요네모토의 화려한 미들 슛으로 막을 열었다. 힘을 담아 오른발에서 튀어나온 불규칙한 탄도는 가와시마 에이지의 손을 튕겨내고 골망을 꿰뚫었다.



그 후에는 가와사키의 맹공을 견뎌내고, 후반 14분에 ‘국립한’ 히라야마가 추가 득점을 올려 도망갔다.


환희의 시상식에서, 미스터 도쿄(자칭)는 등번호 7번 유니폼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이것도 그들의 강한 마음을 알 수 있는 에피소드 중 하나일 것이다.

은퇴한 아사리는 오랫동안 달고 있던 등번호 7번을 자신의 희망에 따라 요네모토에게 양보했다. 매년 자신의 포지션에 라이벌이 와도 불평하지 않고 꾸준한 노력으로 13년간 현역 생활을 쌓아 올렸다. 그 아사리가 마지막으로 클럽에 관철시킨 유일한 고집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매우 송구해하던 요네가, 이때 일을 나중에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던 것이 떠오르면 또 가슴이 뜨거워진다. 전임자의 희망으로 등번호가 이어진 것은 FC 도쿄 역사에서 이 한 사례뿐이기 때문이다.

글: 바바 코헤이(프리라이터)